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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도국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이스라엘
bar.gif 첩의 아들로 태어난 탓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고 살았던 소설 속 홍길동은 조선을 떠나 율도국을 세우고 왕이 됩니다. 율도국이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없는 것 이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이상 위에 세워진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홍길동전이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어찌되었든 봉건시대에 태어나 그런 위험한 발상을 했던 허균은 아슬아슬한 인생길을 걷다가 결국 1618년에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율도국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불행을 잉태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회지배층에 속한 사람의 삶이 이러했으니 사회지배층과 아무 접촉점도 없던 사람들의 삶이 경제적 관점, 사회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참하고 절망적이었을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즈음 재정총감을 지낸 튀르고라는 사람은 박애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노동자의 임금은 생명유지와 재충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을 절대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임금정책의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동서를 불문하고, 인류의 삶을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온 사고방식은 대동소이했던 것입니다. 노예제사회나 봉건제사회에서 노예나 농노로 태어난 사람, 그에 준하는 신분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고 미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이런 오래되고 공통된 역사적 경험을 기억하며 읽을 때 창세기 1장의 이야기처럼 놀랍고 위대한 복음은 없다고 지난 번 글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왕족과 제사장 같은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평등하고 존귀하게 창조하시고 그 모든 인생들에게 이 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복음을 듣고 몰려든 사회적 약자들을 모아 이루신 공동체라는 말씀도 드린 바 있는데, 오늘은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고자 합니다.

 

  

2. 이스라엘: 미국에 앞선 원조 ‘멜팅 팟 melting pot’
bar.gif이스라엘이 국가라 불릴만한 공동체로 처음 등장하는 곳은 애굽 땅입니다. 출애굽기 1장 1~7절은 야곱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이 칠십 인이었는데 그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불어나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노예로 전락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그 땅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출 1:8) 요셉의 출신과 업적이 특별하고 위대했었기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도 궁금하거니와,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 역사에 ‘힉소스 시대’로 불리는 때가 있습니다. <힉소스>는 ‘외국인 지배자들’이라는 뜻의 애굽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힉소스 시대’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에서 온 여러 민족들이 애굽을 다스린 주전 18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의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전 16세기 중반에 아모세라는 애굽인이 이 외국인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신왕국 시대를 여는데, 힉소스 시대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와 소아시아 등지로부터 와서 정착했던 다양한 민족적 배경의 대다수 사람들은 졸지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합니다. 
 

 근 4천 년 전의 역사이기에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온 셈족의 소년이 함족 국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요셉 이야기나 힉소스 시대의 수도 아바리스가 위치한 나일 삼각주에 야곱 일족이 정착하는 이야기 등은 힉소스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서 읽을 때 어렵지 않게 납득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장 8절이 말하는 ‘새 왕’의 행적이 요셉의 시대와 4~5백년 정도 떨어진 주전 13세기 후반의 비돔과 라암셋 건축과 이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어느 특정한 왕을 가리킨다기보다 신왕국 시대의 애굽인 왕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야다>는 상대를 인정하는 친밀한 앎과 관련된 어휘인데, 신왕국 시대의 애굽 왕들은 요셉의 존재 그 자체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외국인 지배자인 요셉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요셉의 자취는 지우고만 싶은 흔적이었고, 외지에서 들어와 큰 무리를 이루고 살다가 노예로 전락한 외국인들의 존재는 출애굽기 1장 10절에서 볼 수 있듯이 늘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왕국 시대의 애굽 왕들은 그들을 혹독한 노동으로 학대하고 통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출애굽시키십니다. 그 때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 되었다고 출애굽기 12장 37절의 말씀은 전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수많은 잡족”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하는데, 그 수많은 잡족들은 필시 야곱의 후예들과 마찬가지로 힉소스 시대에 애굽 땅에 와 정착했다가 졸지에 노예로 전락하여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온 외국출신 노예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 “수많은 잡족”들이 출애굽한 무리의 대다수 구성원들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곳의 40~41절 말씀을 좇아 사백 삼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을 감안하더라도 칠십 인의 야곱 일족이 장정만 육십만이 되는 큰 무리로 생육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정만 육십 만이니, 총인구가 이백만을 족히 넘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이처럼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고난의 공동체로 출발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그래서 역사 내내 외국인들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또 실제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진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과정에서 듣는 라합과 기브온 주민에 관한 이야기, 사사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던 이야기,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 헷 사람 우리야를 비롯해 숱하게 보이는 다윗의 이방인 신하들에 관한 이야기 등에서 그런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부터 다윗과 함께 하면서 다윗의 힘이 되어준 사람들에 관한 아래와 같은 기록은 이스라엘이 어떤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이룬 나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2)

 

 출애굽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런 사람들이 모여 민족적인 배경을 포함한 자신들의 과거를 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탄생해 이스라엘을 이룬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유럽 각국으로부터 미국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름지기 서로에 대한 옛 감정을 잊고 미국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용광로 melting pot'에서 미국인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며 미국을 '멜팅 팟 melting pot’으로 이야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개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미국에 앞서 존재했던 원조 ‘멜팅 팟’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을 기억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고 또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3. ‘멜팅 팟’ 이스라엘의 희망과 기억
bar.gif예컨대, ‘멜팅 팟’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한 공동체에 모여서 사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스라엘을 원조 ‘멜팅 팟’으로 보는 시각은 무엇이 이스라엘을 구성했던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녹여서 하나로 묶어주고 유지시켜주었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창세기 1장이 요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과 열망입니다. 모세와 같은 야곱의 후예들이 “수많은 잡족”들에게 전하고 가르쳤음이 분명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로 불러 모아 녹여서 하나로 만들어주고 유지시켜주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그런 관점으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고 인간이되 인간답게 살 수 없었던 절대다수의 옛날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나라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희망을 보고서 몰려든 사람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신 계명이자 또한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비전이 담긴 십계명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0:2)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음을 기억하는 것, 오늘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아는 것, 오늘 아직 고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복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소망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고 유지시켜 주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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