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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감격
bar.gif한반도는 19세기말까지만 해도 호랑이들이 우글거리던 호랑이의 땅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호랑이로 인한 사건만도 900건에 가깝습니다. “조선은 일 년의 반을 호랑이 잡으러 다니는데 보내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 문상하러 다니느라 보낸다.” 조선을 다녀간 중국 사신들이 하던 말인데, 우리가 오늘 산책하듯 오르는 산길과 평안하게 걷는 밤길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소원한 삶의 환경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다지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기억이 사라지면 감격과 감사도 사라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같은 땅에 살면서도 백 년 전의 일을 기억하기가 이처럼 쉽지 않은데, 구약성경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하는 근동지역에서 펼쳐진 수천 년 전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감격과 기쁨을 전하는 이야기이건만, 그 감격과 기쁨을 옛 사람들처럼 느끼는 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쉽지 않습니다. 다른 땅, 다른 문화에서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온 인류가 오랜 세월을 두고 공유해온 경험과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옛적을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이해하는 방법 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옛적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읽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옛적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노력이 없으면 감격과 기쁨이 있는 성경읽기를 할 수 없습니다. 옛적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읽는 구약성경읽기의 예를 창세기 1장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2. 옛적을 기억하며 읽는 창세기 1장: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이야기
bar.gif창세기 1장을 둘러싼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한 것이 1859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의 출발이 된 책이 불과 약 150년 전에 출현한 것인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인간창조와 연결하여 생각하며 창세기 1장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1859년에서 시간을 한 5백년쯤 뒤로 돌려 가보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의 진술을 의심한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모세가 출애굽 노예들을 상대로 창세기 1장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1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2천 4백 년 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들었던 회중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에 의문을 제기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뒤집어 보면, 창세기 1장의 주제가 만일 누구나 다 믿고 의심치 않던 하나님의 천지창조 그 자체였다면 흥미를 갖고 들을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고자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비슷한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바벨론 창세기라고 불리는 <에누마 엘리쉬>가 그중 하나인데, 그 이야기는 신들의 전쟁을 소재로 하여서 바벨론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교육하고 선전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천지를 창조하는 신은 <마르둑>이라는 신입니다. 마르둑은 자기가 창조한 하늘을 하늘의 신들에게 주고 그 대가로 그들의 충성을 얻습니다. 땅 역시 땅의 신들에게 주고 그 대가로 그들의 충성을 얻습니다. 그렇게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추대를 받아 왕이 된 마르둑은 자기를 위하여 성전을 하나 지어 달라고 땅의 신들에게 주문합니다. 신들이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기쁨에 겨운 마르둑이 신들의 노고를 덜어주고자 신들 대신 노역을 담당할 일꾼들을 창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성전이 완성된 후에 인간들은 하늘과 땅의 신들을 위한 신전에서 신들이 먹고 쓸 것을 공급하여 주는 일꾼들로 살아가는데, 마르둑과 마르둑의 아버지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사로잡은 우두머리 신을 죽이고는 그 피를 흙과 섞어 인간들을 창조합니다. 
 

 이 <에누마 엘리쉬> 이야기에서 하늘과 땅은 신들의 소유입니다. <룰루>라 불린 인간은 신들을 위해 쉼 없이 노동을 하도록 지어진 일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같은 인간이면서도 신적인 지위를 누리는 자들, 곧 신들의 자녀나 대리인으로 여겨진 왕족들과 신들의 종인 제사장 계급을 위해 존재하는 일꾼들에 불과합니다. 흙과 같이 미천한 <룰루> 인간의 핏줄에는 적군을 지휘한 괴물신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수시로 밟고 때려서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또한 <에누마 엘리쉬>가 전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에누마 엘리쉬>는 이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계급사회를 기억하는 이가 오늘 별로 없지만, 사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의 역사는 짧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현인도 노동에 짓눌려 허리가 굽은 노예와 귀족적인 삶으로 멋진 몸을 가꾼 자유인을 비교해 말하기를 자유인은 태초부터 귀하게 창조되었고 노예는 노역에나 맞는 천한 육체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대한 거부는 18세기나 되어야 나타나는데, 인간의 지성이 교육에 달렸다는 내용을 담은 루소의 <에밀> 같은 책들이 그것입니다. 지금 보면 별 것도 아닌 내용인데, 계급이 당연시되던 사회에서는 평민도 귀족과 같은 인격과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발상이 참을 수 없이 반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1844년)에서 주인공인 당테스를 배신한 친구가 한 유명한 말에서 그러한 정서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나보다 더 가진다니, 말이 안 되잖아. 난 귀족이고 넌 말단 사무원의 아들이라고!”
 

 근대 시민사회를 열었다는 프랑스혁명 이후로도 인간에 대한 이런 차별적인 생각은 많은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 오는데, 수천 년 전에 지어진 창세기 1장은 왕족과 사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좇아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당신의 자녀처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해 땅에 충만하라고, 땅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땅은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주신 땅이니 쫓아내고 쫓겨나는 삶, 억누르고 억눌림을 당하는 삶을 살지 말고 모두가 다 피차 나누고 섬기며 당당하고 귀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이들이 출애굽을 한 노예들이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들이건 상관없이 이 말씀은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놀라운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놀랍고 위대한 이야기, 복음 그 자체였음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런 놀라운 생각을 구현하고 있는 사회는 찾기 어렵습니다. 옛적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읽으면 창세기 1장처럼 놀랍고 위대한 이야기는 다시없는 것인데,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 창세기 1장에 담긴 ‘오직 주님’의 신앙과 하나님의 나라 청사진
bar.gif창세기 1장은 옛 사람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준 이야기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면 누구나 다 여호와의 자녀로 존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복음이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모아들이고 그들을 한데 묶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8)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115:13)

 

 구약성경에서 수 없이 보는 이런 말씀,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이런 표현들이 사실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의 특수성을 잘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옛적을 기억하며 들으면 수천 년 동안 성경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놀라운 복음의 선포인 것인데 그 뿌리가 되는 이야기가 창세기 1장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 이야기는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비천한 사람들의 사정을 보아주시고 알아주시고 귀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생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자녀에게 ‘오직 주님’의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신명기 6장 4~9절에 기록된 <쉐마> 말씀이 이스라엘의 존립기반이고 형통함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이 출애굽 노예들의 삶처럼 어렵고 힘들지라도 여호와께로 나아가 그분께 기도하고 예배하면 그분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구약성경은 첫 장에서부터 그런 신앙, ‘오직 주님’의 신앙을 줄기차게 이야기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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