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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gif 여성 순교자 문준경(文俊卿 : 1891~1950) 전도사는 1891년 2월 2일 무안군 암태면 수곡리 문재경 씨의 3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아가며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문준경 전도사는 1908년 3월 17세가 되던 해에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지도면 등선리에 사는 정근택(정운삼 씨 삼남)씨와 결혼하였으나,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남편의 외도 속에서 20년간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이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어머니는 큰 시숙이 모셔가고 홀로 남게 된 문준경 전도사는 재봉틀 하나 만을 가지고 시댁을 떠나 친정 큰오빠가 살고 있는 목포로 이사하여 단칸 셋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게 되었다. 
 

 그 무렵 성결교단은 오순절과 같은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목포의 북교동교회에서도 성령부흥이 불이 붙었다. 문 전도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다해 배우고 지내면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전도를 했으며, 37세에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다. 문 전도사는 무슨 일이든 온 정성을 다했으므로 신앙성장의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예배와 장례식, 혼인식 등에서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찬양을 하여 인기가 있었다. 또한 일가친척, 친지들 집을 찾아다니며 축호전도로 곳곳을 누볐다. 
 

 첫 전도여행으로 20년 만에 암태면에 있는 친정을 찾아갔을 때, 부모님께서는 불쌍한 생과부 딸을 맞으며 말할 수 없이 가슴을 아파했다. 그곳에서도 전도에 열심을 내었지만 유교전통의 아버지를 전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네가 시집가서 고생하더니 서양귀신이 들려 실성했구나."라고 하며 오물을 퍼다 머리 위로 퍼부으면서 "귀신아, 썩 물러가라."라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문 전도사는 길을 가면서도 찬송하고 꿈속에서도 늘 찬송했으며, 주님의 사랑과 한 맺힌 자신의 인생 때문에 눈물의 샘이 마를 날이 없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경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경성성경학교는 6개월은 전도를 실천하고 6개월은 공부하는 6년제 학교였다.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시작하여 마늘장수, 물장수, 삯바느질 등 온갖 일을 하며 고학을 하다가 나중에는 정식 학생이 되었다. 
 

 문준경 전도사의 기숙사 방은 '사랑의 방'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고, 모든 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문 전도사를 따랐다. 문 전도사의 삶은 항상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이었다. 한 번은 병든 홀어머니 때문에 울고 있는 여학생을 보고 단 하나의 재산인 손재봉틀을 들고 나가 팔아서 100원을 마련해 주었다. 또 한 번은 유일한 유산인 명화병풍을 200원에 팔아 어려운 신학생을 도와주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는 6개월의 인턴 실습을 마친 후 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돈 한 푼도 없이 목포역으로 가고 있었다. 사과 행상을 하는 어떤 집사가 문 전도사를 보고 "돈도 없이 나왔지라우?"라고 물었다. 그 집사는 문 전도사가 돈이 한 푼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 전도사는 서슴없이 "사람이 가는 것이지, 돈이 간당가?“라고 대답했으며, 그 집사는 성령의 감동으로 문 전도사의 학비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첫 방학을 맞았을 때 문 전도사는 신안군 임자도로 내려갔다. 그곳에 장년 20명과 주일학생 60명이 모이는 임자진리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가을학기에 올라와 교회개척을 보고한 후 정식으로 신학생이 되었다. 이처럼 1933년에 임자진리교회, 1935년에는 증동리교회를 개척하여 그곳에서 시무하였다. 문준경 전도사는 여자의 몸으로 신안군의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풍선)를 타고 다니거나 갯벌에 빠져가며 다니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1936년 대초리교회, 방축리, 제원, 우전리, 사옥도 등 섬 곳곳에 예배소를 설치). 특히 의사와 산파로서 섬사람들을 치료하였고, 장티푸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집에 직접 들어가서 환자들을 돌보고 장례를 치루는 일을 감당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고치고, 도와주고, 섬겼다.
 

 문준경 전도사는 찬송을 잘 부르는 놀이꾼이 되어 멋들어진 노래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탁월한 복음전도자였다. 샤머니즘이 강했던 섬사람들이 문 전도사의 이러한 진솔한 모습에 감동하여 하나 둘씩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섬마을은 미신이 많은 곳이다. 재앙을 입고 동티가 나면 무당을 불러 굿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많은 집에서 무당 대신 문 전도사에게 기도를 청했다. 문 전도사는 마을의 사제(司祭)였으며, 간호사, 산파, 목자, 만인의 어머니였다. 일제강점기 때 어떤 마을에 장질부사(염병)가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전염이 두려워 버려진 환자들이 많았지만 가족들조차 시체 치우는 일을 기피하였다. 그러나 문준경 전도사는 "나는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보았고 직접 시체를 매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남편과 소실이 붙잡혀 있는 감옥에 매일같이 세탁물과 음식을 가져다주고 뒷바라지를 하여 모두를 감격시키기도 했다. 지방의 빨갱이들은 문준경 전도사가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으므로 즉결처분을 하지 못하고 상부인 목포 내무서로 이송했는데, 목포는 이미 빨갱이들이 도망가고 없어서 자동으로 석방이 되었다. 그러나 문준경 전도사는 교인들과 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못 잊어 모두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도살장 같은 증동리로 되돌아왔고, 1950년 10월 5일,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혀 찔리고 맞으며 모래밭 사형장으로 개처럼 끌려갔다. 반죽음이 되면서도 사뭇 저들을 용서하라고 기도하였으며, 몸이 벌집이 되기 전 "주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5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문준경 전도사는 사형장으로 끌려가서도 백정희 전도사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간신히 형지(刑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백정희 전도사는 문 전도사가 순교한 후 3년 동안 소복을 입었고, 지금도 새벽마다 눈물로 교회 마룻바닥을 적신다. 현재 백정희 전도사는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재원교회를 지키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대표적인 여성 순교자로 모범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다. 문 전도사가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도처소가 되고 교회가 세워져 증도에는 11개의 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다. 증도는 복음화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주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며, 그야말로 신앙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영향이 신안군 전체로 퍼져 나가 14개 면, 1004개 섬으로 구성된 신안의 섬 일대에 100여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지금도 그 영향력이 각 교회에 미치고 있으며 신안군 복음화율 역시 35% 이상으로 국내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제일 높은 지역이 되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의 삶과 순교는 지금도 증도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주민들의 자손을 통해 믿음의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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