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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gif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학창시절부터 교회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교회생활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진짜 신앙생활은 결혼 2년차이던 1987년, 저희 가족이 명성교회에 등록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영적 훈련을 받게 된 계기는 남편의 일을 두고 기도하면서부터입니다.  

 

 남편이 지인에게 연대보증을 섰는데 그 회사가 잘못되어 보증 선 부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책임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남편은 먼 미래를 바라보고 10년 동안 그 책임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그 기간이 저에게는 광야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며 잘 믿기 위하여 끊임없이 다짐을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시작했던 1부 새벽예배에 늘 참석하여 주님께 도움을 청했으며, 집에서는 오전 10시부터 또 기도하면서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기도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나의 어려운 사정을 구하기보다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처럼 저희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생활 잘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을 인내하며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셨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으로 모든 어려운 상황을 감사와 기쁨으로 감당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저는 교회 일에 더욱 힘쓰자는 마음으로 성전 청소부터 시작하여 구역장, 여선교회 회장, 교구 총무단으로 봉사했으며, 현재는 구역장과 교구 심방부장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훈련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많이 있었지만 기쁘게 감당하다보니 하나님께서는 저와 저희 가정에 영적으로, 육적으로 큰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훈련을 받을 때는 요한3서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훈련이 끝나고 나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영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통하여 남편 또한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안수집사가 되었고, 18년 동안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업장도 형통의 축복을 주시어 늘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딸이 모태신앙으로 믿음 안에서 교회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현재 저와 함께 소망찬양대에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큰딸은 작년 11월에 농협에 합격하여 연수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둘째 딸은 올해 9월 교환학생으로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두 딸이 새 성전 건축헌금을 작정하고 2년 동안 모은 용돈으로 헌금을 하였습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 믿음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 두 딸을 위해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붙잡고 늘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두 딸의 앞길을 형통하게 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어려움을 기도와 말씀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과 같은 축복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앞으로도 저와 저희 가정이 믿음의 주님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자로 승리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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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gif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옷을 입는 5월, 이른 새벽 문을 나서면 차가운 공기에 스며든 아카시아 향기가 숨 막힐 듯 저의 온몸을 휘감습니다. 아파트 담장 위에 걸터앉아 툭툭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줄장미를 보며 어느덧 저의 가슴속에서는 찬양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축복, 주께 있네! 주 안에 있네~ ♪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의 끝자락에 저희 가정을 축복하신 주님을 부족한 글로써 찬양할 수 있으니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확실한 신앙고백 없이 교회에 다니던 저는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나 세상 속에 묻혀 살았습니다. 편안히 길을 갈 때는 보이지 않으나 묵묵히 저희 뒤에서 함께하시던 주님! 그런 주님께서 1996년 총동원 전도주일에 친정오빠를 통해 저를 명성교회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여전히 세상 속에 있는 남편을 뒤로 한 채 매주 답십리에서 지하철을 타고 주일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특별새벽집회 때는 개근하기 위해 새벽 2시에 아이들을 깨워서 한걸음에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일까요? 많은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승리의 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먼저 저희 가정이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던 남편이 사업장 문제로 고민하다가 마침내 교회 근처로 사업장을 이전하였습니다. 이후에 남편의 마음이 움직여 명성교회에 등록하였고, 등록자 교육을 통해 은혜를 받아 그토록 좋아하던 술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희 식구들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여러 훈련의 과정을 통해 든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마련했던 아파트가 IMF의 큰 풍랑 속에 휩쓸려 빈털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귀에 들리지 않는 암흑 같은 현실 속에 저희 가정이 나갈 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임재와 사랑을 구하며 성경 읽기, 가정예배, 새벽기도와 모든 공적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였습니다. 예배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예배를 통하여 역사하시며,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당회장목사님의 말씀이 정말로 의심 없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은혜 속에 지내던 남편은 차량부 봉사를 하며 2004년 안수집사가 되었고, 남선교회 회장과 찬양대원으로 최선을 다해 봉사하였습니다. 두 자녀를 통해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과외를 받거나 학원에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도 믿음 안에서 잘 자랐으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모두 의과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또한 딸은 의대 6년간 대부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감사한 것은 딸이 인턴으로 근무하며 받은 첫 월급과 당직비 모두를 주님께 드리는 믿음의 자녀로 잘 자랐다는 사실입니다. 아들도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제자학교, 미화부와 교내 기독교 동아리 회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12월에는 새로운 꿈과 비전을 주셔서 성적이 뛰어나게 좋지 않았어도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성전건축에도 참여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아들은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과외 등으로 힘들게 모은 돈을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저희 부부는 여유가 없는 탓에 그동안 모아두었던 청약적금을 해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기도하며 마련하기로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작년 12월 작정했던 금액보다 더 넘치게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건축헌금을 드리는 날,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시는 주님께 저희 가족 모두는 기뻐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힘들게 모았던 돈을 선뜻 건축헌금으로 드린 아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은파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일 역시 아들의 믿음을 기뻐 받으신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당회장목사님을 통해 저희 가정에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순간순간마다 삶 가운데 함께하시며 세밀하게 위로하시는 주님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감사하여 늘 찬양 속에 살고, 언제, 어디서든지 눈을 들어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삶이 풍성한 생명과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하게 은혜를 주시고, 기쁨 가운데 주님을 찬양할 이유로 충만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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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gif 저는 아주 엄격한 전통적인 유교가정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제사 때면 저의 아버님은 커다란 갓을 쓰시고 제사 예복을 갖추고 조상님께 절을 하고 축문을 읽으셨습니다. 제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아주 절친한 친구가 전도하여 호기심에 따라 간 것이 믿음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엔 교회에 가면 예쁜 여학생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직장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본격적인 믿음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군대 대신 특례 연구 보충역으로 연구소에 입사할 수 있도록 절실하게 기도했는데 4주간의 군 훈련만 마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민간 연구소인 삼성전자 연구소에 입사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삼성전자에 함께 근무하던 동료 직원의 소개로 명성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당회장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등록도 안하고 다녔는데 구역장님의 권유로 등록을 한 후에는 빨리 다음 주일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991년에 딸 소연이를 주셨습니다. 소연이는 어려서부터 유아부, 초등부, 중등부를 거쳐 착실하게 믿음 생활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딸이 외국어고등학교를 나와 의과대학에 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중3 때 미국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공립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온 딸은 미국 명문 사립고교에 가서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가 되겠다고 며칠을 매달렸습니다. 1년 학비만 4만 달러에 기타 비용을 더하면 족히 5만 달러를 부담해야 가능한 유학이었습니다. 학비도 문제지만 미성년자인 딸이 홀로 유학을 간다는 것이 탐탁지 않아 완강하게 반대했으나, 워낙 강하게 설득하는 딸을 보면서 학비를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주님의 응답을 받고 과감하게 유학을 허락했습니다.

 

 다행이 소연이는 학업에 전념하여 모든 과목에 올 A를 받고 12학년에는 학생회장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 설립이후 최초로 외국학생인 소연이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대통령 오바마 상)도 수상하는 기적을 주셨습니다.
학업 성적이 탁월한 소연이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은 물론 지원한 전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는 딸에게 장학금을 주는 아이비리그 대학은 없었습니다. 부득이하게 미국 동부에서 가장 좋은 명문 약학대학인 로커스 대학에 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6년간의 유학비를 넉넉하게 벌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다니던 회사의 갑작스런 구조조정으로 나이가 많은 저는 강제로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유학비와 생활비 걱정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제에게 새로운 직장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마음은 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연구소장 공채 기사를 보고 지원을 했습니다. 코스닥에 등록된 비교적 대우가 좋은 회사였습니다. 저는 공학박사도 아니고 명문대학도 안 나온 데다 나이까지 많았습니다. 그래서 면접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후 교구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슬기롭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주시고, 면접관의 마음에 딱 맞는 답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면접을 보러가면서도 마태복음 7장 7절-8절을 암송했습니다. 발표하는 날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만 열심히 했습니다. 면접을 본 수많은 공학박사, 일류대학 출신을 물리치고 제가 합격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순간 저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더구나 5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더 낮은 자세로 주님을 섬기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밝은소리 축하 란을 보고 여러 집사님들의 축하 메시지도 수십 통 받았습니다. 또한 주님은 부족한 저에게 피택 집사라는 직분도 주셨습니다. 피택 교육을 받는 동안 새벽기도 1년간 출석체크를 한다고 하여 저는 피택 교육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새벽잠이 많아서 3월과 9월 특별새벽집회 때만 빠짐없이 출석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번에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합격한 연구소가 충북 음성에 있어서 저는 교구목사님께 허락을 받고 금요일, 토요일, 주일에만 본 교회에 출석하고, 기타 요일에는 음성의 숙소 근처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저는 열심히 피택 교육을 받고 있으며, 10년간 봉사한 차량1부 봉사도 주일마다 새벽 6시에 나와 은혜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2011년에 주신 주님의 놀라운 축복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언제나 기도해주시는 당회장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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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gif 화내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시며 오늘까지 저 같은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만들어 가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저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동네 언니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의 핍박 중에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권선징악의 두려운 하나님만 알았지 사랑의 주님은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남편도 전도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결혼하였습니다.
 그 교만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는 지옥 그 자체였던 결혼생활과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하면서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저를 때리다가 손가락이 으스러졌는데 시어머님은 “맞은 년 대가리는 멀쩡한데 왜 내 아들 손이 이렇게 됐냐!” 고 우실 정도였습니다. 그런 환경이라서 저는 심한 우울증과 극도의 공허함으로 세 번이나 자살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때마다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남편의 손찌검에도 저의 교만이 깨어지지 않자 주님께서는 아들의 아토피를 통해서 저를 겸손하게 만드셨습니다. 어느 날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성경을 제대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제 신앙생활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기분은 마치 남들 앞에서 벌거벗고 서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 1독과 40일 작정기도가 함께 끝나던 날, 주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제가 저지른 크고 작은 모든 죄를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의 저금통에서 몰래 동전을 꺼내어 눈깔사탕을 사먹은 것까지 마치 슬라이드가 돌아가는 것처럼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착하고 의롭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통해서 십계명 중에 단 한 계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생각을 하니 제 마음이 마치 십자가를 진 것처럼 고통스러워졌습니다. 그 후에 저의 입에서는 감사의 말씀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에 ‘화목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주시기 위해 역사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모든 것을 담대하게 인내하고 감당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모든 일에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돌이켜 보면 언제나 주님보다 십리쯤 앞서 있고, 똑바로 걷고 싶은데 늘 비틀거리는 저를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벌하지 않으시고 더 안타까워하시고 더 사랑해 주시는 주님께 너무너무 감사하고 죄송해서 눈물만 흘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부족하지만 오직 주님의 기쁨이 되려고 애쓴 것 밖에 없는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는 신명기 6장 10-11절의 말씀처럼 그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또한 시어머니를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하게 하셨으며, 시어머니는 5년 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용기를 내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대항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KBS1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이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남편의 폭력도 고쳐지고, 툭하면 욕하는 버릇도 저의 앵무새 작전으로 고쳐졌습니다. 모두 주님께서 용기와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편은 주일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제가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에 남편은 더 많이 변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아들, 딸이 결혼도 잘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 저희들은 아직도 귀머거리요, 소경이요, 앉은뱅이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저희와 항상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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