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하이에나가 물어뜯은 소년의 얼굴 반쪽 '코리아 병원'이 되살린다.

아디스아바바=이태훈기자(libra@chosun.com)

에티오피아서 8년째 자선 진료 명성기독병원
매년 5세미만 47만명씩 죽어가 - 전국에 의사 4800명 수준… 경력 쌓이면 돈벌이 찾아 떠나
조선시대 세브란스병원처럼… - 6·25 참전용사는 무료 진료… 年 10만여명 환자에 새 삶

2012041800087_0.jpg
icon_img_caption.jpg 김철수 병원장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동쪽으로 약 200㎞ 떨어진 하라르에서 하이에나 떼가 10살 프롬사(Fromsa)와 친구 2명을 덮쳤다. 마을 결혼잔치에서 고기 굽는 냄새를 맡고 몰려온 하이에나들에게 아이들은 '먹잇감'이 됐다. 비명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아이 둘은 이미 숨이 끊긴 상태였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프롬사는 얼굴 오른쪽을 거의 다 물어뜯겼다. 턱뼈는 으스러졌고 팔과 허벅지의 살도 뭉텅 잘려나갔다. 악몽 같은 그날은 지난달 24일이었다. 프롬사는 아디스아바바의 명성기독병원(MCM)으로 옮겨졌다. 그 사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11일 MCM 중환자실에서 만난 프롬사는 온몸에 튜브를 꽂은 채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가끔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삶의 희망을 향한 미소였다.

아디스아바바의 '코리아 병원'

태중에 엽산 부족과 영양결핍으로 머리가 농구공처럼 부풀어오르는 소아 뇌수종, 면역력 저하로 입 안의 세균이 얼굴을 파먹는 참혹한 질병 '노마(Noma·水癌)', 약이 듣지 않는 항생제 내성 폐결핵…. 예전 같으면 속절없이 죽음을 맞아야 할 질병과 사고를 겪은 에티오피아인들이 MCM에서 새 삶을 얻고 있다. 15년 전 4500명이던 에티오피아 의사 숫자는 지금도 4800명 수준. 매년 5세 미만 아이 47만명이 병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 많은 의사들은 조금만 경력이 쌓이면 나은 벌이를 찾아 나라를 떠난다.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담임목사 김삼환)는 지난 2004년 이 병원을 세웠다. 건축비와 시설비 등으로 지금까지 250억원이 넘는 돈을 들였다. 병원 직원 346명 중 의사 5명과 간호사 4명을 포함, 33명이 한국인. MCM은 2010년 10만4600여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작년엔 약 4억원을 무료 이동진료와 수술 등 '자선진료'에 썼다. 현지인들이 '코리아 병원'이라고 부르는 이 병원엔 현지 외교관과 고위 관료, 부유층도 찾을 정도이고, 총리와 복지부 장관이 나서서 현지 병원에 재정자립을 이룬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2012041800087_1.jpg
icon_img_caption.jpg 하이에나떼의 습격을 받은 프롬사군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명성기독병원(MCM) 중환자실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친구 둘을 잃고 혼자 간신히 살아남은 프롬사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한다. /이태훈 기자 libra@chosun.com
참전용사들은 무료진료

"다들 나이가 들어 여기저기 불편한 데가 많지요. '코리아 병원'에 갈 때마다 우릴 잊지 않고 있는 한국인들의 따뜻함을 느낍니다."

12일 아디스아바바 '한국전쟁 추모공원(Korean War Memorial Park)'내 참전용사회관에서 만난 6·25참전용사협회장 멜레세 테세마(82) 예비역 대령의 말이다. 에티오피아는 6·25 때 6037명을 한국에 파병했고, 현재 생존자는 약 450여명. 1974년 공산 쿠데타로 제정(帝政)이 무너지고 친소·친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한을 위해 싸웠던 6·25참전용사들은 투옥과 고문, 사회적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1990년대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땐 참전용사들은 이미 가난한 노인이 됐다. MCM은 참전군인들에겐 전액 무료, 배우자는 50%만 받고 진료해준다. 참전용사협회 부회장 일마 벨라츄(81)씨는 "지금 우리의 삶은 '코리아 병원' 덕에 누리는 '덤'"이라고 했다. MCM은 참전군인 후손들을 병원 직원으로 특채하는 것은 물론, 오는 9월 한 학년 30명 규모로 개교할 명성의대(MMC)에도 특별전형으로 선발해 교육할 계획이다.

"110년전 조선의 세브란스처럼"

MCM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명성의대(MMC)에 이어 내년엔 모자보건센터를 착공해 2016년 개원할 예정이고, 2017년부터는 전문 간호사 훈련과정을 개설해 그 2년 뒤부터 지방 거점병원에 파송할 계획도 세웠다. 김철수 병원장은 "110년 전 조선에 설립된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에 의료서비스와 의학교육의 기틀을 잡았다. 의료진과 직원들은 MCM과 MMC를 에티오피아 '의료 자립'의 시발점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라고 했다. 김종근 주(駐)에티오피아 대사는 "돈을 쥐여주는 방식의 원조는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MCM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지속가능한 원조'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