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 이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성탄절은 하늘 보좌에 계시던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베들레헴 마구간에 아기로 태어나신 거룩한 날입니다.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문에 연장자가 부르기 쉽고 뜻있는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름을 보면 부모가 아기에게 가졌던 소망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두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메시야의 이름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별명이 생겨나지만 예수님은 태어나기 전부터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전능하신 창조주 하님께서 지어주신 예수, 임마누엘,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이 있습니다(사9:4-7). 이런 이름들은 주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실 은혜를 그 안에 담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기 예수 이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예수”(Ἰησοῦς)라는 이름은 “구원자” 그리고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여호수아” 혹은 짧은 형태의 “예수아”(느7:7)의 헬라어 표기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1)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으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는 내용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창 4:25). 이 이름은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2.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1:23). 아기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인 까닭은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의 최고계시(最高啓示)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와 성령님의 계심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맹점은 예수님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민족이나 아무리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도 예수님 없이는 한 순간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없이는 성령충만이나 성령님을 모시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오셔야 성부와 성령께서도 역사하십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거하시매”(ἐσκήνωσεν, 에스케노센)라는 말은 “천막을 치다”, “야영하다”, “거주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성막을 치고 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3. “기묘자”라는 이름은 “이상하다”, “희한하다”, “놀랍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원더풀”(Wonder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장차 오실 메시야를 원더풀이라고 한 것은 그 분이 신비한 분이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신비한가? 예언대로 오신 것이 신비합니다. 처녀가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한 것도 신비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으신 것,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과 더불어 영광중에 재림하실 것인데 이 모든 것들이 신비하고 놀랍습니다. 성경은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살후1:10)고 말씀하셨습니다.

 

4. “모사”라는 이름은 “상담자”(Counselor)라는 뜻입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기묘자와 모사를 합하여 원더풀 카운슬러(Wonderful Counselor)로 번역했습니다. 놀라운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신약에 “보혜사”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보혜사”(παράκλτος, 파라클레토스)는 “옆에 서는 자”라는 뜻으로 “중보자, 위로자, 변호자, 가르치는 자, 상담자, 인도자”를 가리킵니다(요14:16,26; 15:26).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상담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충만하면 영적인 위대한 일들이 쉽게 알아지고 깨달아집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5.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힘 있는 용사”라는 뜻입니다. 신적(神的) 계획의 수립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기묘자와 모사”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샤다이”(ידשׁ לא, 창17:1-5)를 사용했습니다.

 

원래 엘 샤다이는 “산의 신”이란 말이었으나 칠십인역에서 전능하신 하나님(All Sufficient one)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엘 깁보르”(רגּבּוֹ לא, 사9:6)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힘 있는 용사”라는 의미로서 힘 있는 용사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아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神性)을 소유한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엘 깁보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와 부르게 될 하나님의 이름으로(사10:21),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신10:17; 느9:32; 시24:8; 렘32:18). 그리고 이 용어는 대적과 사단을 결박하고 죄악과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6.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이름은 성부 하나님 앞에서는 독생자이시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처럼 부성애를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영존함”은 신성에서 유래하며 강조점은 “아버지”에 있습니다.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사22:21; 욥29:16; 시103:13).

 

따라서 “영존하시는 아버지”(דעיבא, 아비아드)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세상의 중심이며,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전능자입니다. 아버지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녀를 사랑하고 부양하며 보호하는 의무를 다하되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의 아버지(보호자)가 되시어 모든 부양과 보호의 책무를 다할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하셨고,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며 우리 안에 임하셔서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7. “평강의 왕”이란 이름은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왕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왕이란 높은 곳에 앉아 밑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강의 왕”(םוֹלשׁ-רשׂ, 사르-솰롬)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왕처럼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왕이심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사9:6)라고 했는데, 정사(政事, הרשׁמ, 미쓰라)라는 말은 “지도자가 되다”라는 뜻의 “사라”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통치”, 즉 왕권을 의미합니다. 고대 국가의 왕은 흔히 왕권을 상징하는 열쇠를 어깨에 메거나 혹은 금사슬을 어깨에 걸쳤습니다.

 

오늘날도 군대의 지위를 나타내는 계급장을 어깨 위에 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메셨고 결국은 자기 백성을 위해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평화의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며 또한 다스릴 것입니다(시72:3,7; 렘33:6; 미5:4; 슥9:10 등).

 

독재자는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둡니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그 나라는 주님이 왕이십니다. 그 분의 다스림은 공평하십니다. 고통은 사라지고 자유와 평강이 넘칩니다. 사랑과 평화가 가득합니다.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으며, 바울 사도 역시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고 했습니다. 주님은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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