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애플은 디터 람스를 모방하지 않았다
올해 초 대림미술관에서 디터 람스(Dieter Rams)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아마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 전시를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시를 위해 서울을 찾은 이 백발 노장 디자이너를 저는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간담회에서는 아니나다를까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가 디자인한 아이팟과 아이폰이 그의 디자인을 모방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디터람스는 “그의 스타일대로 응용한 것”이라며 조너선 아이브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칭찬이라고 답했지요. 디터 람스와 애플 디자인의 유사성에 관해서 가장 명확한 답변을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이 전시를 최초로 기획했던 일본 산토리미술관의 큐레이터였습니다. 그녀는 “애플이 디터람스의 디자인을 모방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얘기다. 그것은 유사성, 복제성의 문제가 아니라 디터 람스와 조너선 아이브가 같은 디자인 철학을 공유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시원한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조너선 아이브가 몇 해전 디터 람스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영감을 준 점에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참, 디터람스는 (조너선 아이브가 하나 선물하기는 했지만) 아이폰이 아니라 모토로라를 쓴답니다.

오늘날 좋은 디자인의 요건을 꼽아보라 한다면 친환경성, 혁신성, 유용성, 단순성, 지속가능성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놀랍게도 디터 람스가 이미 1980년대부터 주장했던 ‘좋은 디자인을 위한 10계명’의 요건들입니다. 그에게 10계명 중 오늘날 수정할만한 것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바꿀 게 없다. 오히려 과거보다 지금 더 중요해졌다고 본다”라는 자신만만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좋은 디자인을 위한 10계명’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과 디자인은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 후카사와 나오토, 재스퍼 모리슨 등에게 분명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요.

몇 달 전 저는 한 소셜커머스 사이트에 올라온 ‘날개 없는 선풍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선풍기의 ‘회전 날개’를 없애 혁신적인 디자인을 완성한 다이슨 에어멀티플라이어를 카피한 제품인데, ‘콘셉트는 같지만 디자인과 성능이 다른’ 차원이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 그냥 완전히 똑같은 제품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써보면 성능의 차이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름이라 그런지 카피하는 곳도 한두 곳이 아닌데다 각종 온라인 배너부터 시작해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유사품(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디자인 모방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에 관한 얘기는 둘째치고, 워낙 혁신적인 디자인과 기능을 가진 제품인지라 그걸 복제한 타사의 제품들이 버젓이 광고까지 하면서 판매에 열을 올리는 상황이 그저 어이 없을 따름이었습니다. 또 몇 년 전 한 문구 회사의 공모전 광고는 그 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포스터에서 글자 부분만 한글로 고친 것이라 그걸 보는 순간 그냥 막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모방이 아니라 복사라고 해도 무방한 디자인을 종종 만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예 대놓고 따라 하면 오마주나 패러디가 된다는 말장난도 있습니다만 저는 닮았다, 안 닮았다를 따지는 오래된 모방 논쟁에 한마디 보태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방과 영향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방은 값싼 유혹 같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위대한 디자이너일 수도, 혁신적인 제품일 수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트렌드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걸 알기 위해 투자한 사람은 영향을 받고, 손쉽게 열매만을 얻으려는 사람은 형태만을 베끼는 모방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피카소는 “좋은 아티스트는 베끼고 훌륭한 아티스트는 훔친다”고 했습니다. 영향 받기로 작정했다면 완벽하게 훔쳐서 소화까지 한 뒤에 창조하면 좋겠습니다.

글: 전은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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