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기사전송 2008-11-27 06:09 
 
일산병원, 매주 수화교실… 환자였던 농아인이 교사로 "''식후 30분, 약 드세요'' 수화로 설명할 수 있어 뿌듯"
어둠이 짙게 깔린 지난 25일 오후 6시 고양시 일산동구 일산병원. 한쪽 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양손 가득 서류첩을 든 혈액종양내과 맹호영(여·34) 교수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지하 1층 세미나실로 들어섰다. 맹씨에 이어 의사, 간호사 등 13명이 차례로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직원들 앞에 선 교사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진석(28)씨. 이씨가 다양한 손 동작으로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통역사 박지연씨가 "수화를 배우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숫자 1부터 10까지 배워 보겠습니다"라고 통역했다.

수업이 시작되자 의사·간호사들은 진지한 학생으로 돌변했다. 이씨가 수화를 보여주면 낑낑대며 따라 하고, 헷갈리는 손 동작은 수첩에 그림으로 그려 외우기도 했다. 한 병원 직원은 "이제 농아 환자들에게 '밥 먹고 30분 후 약을 먹으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며 뿌듯해했다. 매주 화요일 1시간씩 5주째 열리고 있는 수화교실은 신장내과 신석균(48) 교수의 뜻밖의 경험에서 시작됐다.

◆혼자 병원 못 와 병 키운 농아인

지난 6월 신 교수의 진료실에 한 청년이 들어왔다. 평소처럼 "어디가 불편하세요?"라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놀라웠다. 청년은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냈고 손을 움직이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농아인 이진석씨였다. 이씨는 신장이 기능을 못해 몸이 퉁퉁 붓는 등 곧 투석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 혼자 병원에 올 수 없어 병을 키운 것이다.

신 교수는 통역사의 도움으로 이씨를 치료하면서도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통역사를 거치니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답답했다. 무엇보다 여건이 안돼 병원에 오지 못했던 이씨가 안타까웠다. 신씨는 '진석이를 위해 수화를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매주 인근 교회에 찾아가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농아인과 함께 수화를 배우기를 두어 달, 신 교수는 병원의 다른 직원들도 수화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파주에만 5000명의 농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 환자 중 농아인은 거의 없어요. 의사 소통이 안되니 아파도 못 오는 거죠. 직원들이 조금만 더 정성을 쏟으면 농아인들이 혼자서 병원에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 교수는 병원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수화 수강생을 모집했다. 호응은 예상 외로 뜨거웠다. 1기 15명 정원이 금세 차 버렸고, 미리 모집한 2기 정원도 12시간 만에 마감됐다.

◆농아인에게 푸근한 병원이 되는 날까지

수화교실의 교사는 바로 신 교수의 농아인 환자였던 이진석씨다. 아파도 병원을 찾을 수 없었던 농아인 이씨가 의사와 간호사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것이다. 수화 통역사 박지연씨가 이씨와 함께 수업을 진행한다. 신 교수의 목표는 11주 과정인 수화교실을 10기까지 진행하는 것. 하지만 직원들이 수화를 능숙히 하는 것만이 희망 사항은 아니다. "농아인을 접할 기회가 드물기 때문에 보통 두려움이 앞섭니다. 직원들이 농아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좋겠습니다."(신 교수)

[김연주 기자 carol@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