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님의 삶은 대속의 삶, 본이 되는 삶, 성령께서 인도하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삶은 사람을 살리는 삶이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엡 2:1)”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우리의 삶 역시 사람을 살리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조차도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험산계곡을 헤매며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종종 먼저 믿은 자들이 나중 믿은 자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판단하여 실족시키는 일이 허다하다. 성경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비난했다. 그때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하)”고 하셨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많은 교인들이 세상에서 비난받고 멸시받는 자들이 자칭 의로운 자기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고깝게 여겨 그들을 밖으로 내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2013년 1월 6일~9일에 충남에 있는 D기도원에 신년금식기도를 하러 가서 강사 목사님에게 간증을 들으며 깊이 회개하고 큰 은혜를 받았다. 또한 교회 안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신앙칼럼을 읽는 성도들도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 간증을 여기에 옮겨 본다.

 

   어느 교회에 예쁜 젊은 여자가 등록했다. 그녀는 처음 교회에 등록한 후 모든 예배에 참석하였다.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여 늘 울며 기도했다. 금요철야기도회에도 참석했다. 예배 때마다 어찌나 말씀을 사모하는지 강단에 선 목사님은 마음이 흐뭇했다. 그녀는 예배 전에 일찍 나와서 강단과 강대상을 청소하고 강대상에 물 컵을 준비해두곤 했다. 예배가 끝나면 말씀을 전하느라 목이 타고 쉬었을 목사님을 위해서 모과차나 배즙 등을 집에서 미리 준비해 와서 목양관에서 쉬고 있는 목사님에게 드리곤 했다.

 

   3년 동안 변함없이 그리했다. 3년 후 새해 첫 주일에 목사님은 그녀에게 집사 직분을 주었다. 그 다음 주일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이 목양관에 들어갔을 때 여전도회장을 비롯하여 여전도회 임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목사님에게 어떻게 창녀에게 집사 직분을 줄 수 있느냐고, 창녀가 집사가 된 교회에서는 일을 할 수 없으니 자기들이 여전도회 직분을 내놓겠다고 항의했다.

 

   바로 그 때 모과차를 들고 목양관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밖에서 여전도회 임원들의 큰소리를 들었다. 너무도 놀란 그녀는 그들에게 들킬세라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가 과거에 창녀였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도 모를 줄 알고 자기가 살던 지역을 멀리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와서 교회를 다녔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과거에 대해 그 교회 성도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알았는지 그녀가 온 처음부터 뒤에서 씹고 또 씹어왔다는 것을 정작 그녀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엎드려 펑펑 울었다. 며칠을 울고 또 울었으나 그녀는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교회, 그러나 어디로 간들 누가 나를 환영해줄까, 앞이 캄캄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어딘들 내가 다닐 교회가 있을까, 그녀는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유서 아닌 유서를 썼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했다.

 

   그녀가 자살하자, 이웃이 발견하여 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이 와서 조사를 했다. 그녀의 방에는 침구와 몇 개의 옷, 그리고 〇〇교회 주보와 전도지만 한쪽 벽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주보를 보고 경찰은 그 교회 목사님에게 연락을 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 달려갔다. 목사님은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유서 아닌 유서 한 장을 발견했다. A4 한 면에 빼곡하게 써내려간 단 한 문장은 “창녀가 집사가 되어서 죄송합니다”였다.

 

   목사님은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며 속울음을 울었다. 장례식이 끝날 즈음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오열을 했다. 그녀의 오빠였다. 장례식을 마치고 그 청년은 술을 마시며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 남매는 연년생인데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아원에서 교회를 다녔다.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자 고아원을 나가야했다. 둘이 고아원을 나왔으나 앞이 막막했다. 동생이 말했다. “오빠가 먼저 대학을 가서 공부해. 그동안 내가 공장에 다니면서 오빠 뒷바라지를 할게.” 그리하여 둘이 반 지하 단칸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오빠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동생은 공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그녀는 어느 날 공장에서 야근을 하고 밤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동네 깡패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소문이 퍼져 공장을 나갈 수가 없었다. 오빠의 등록금을 내야 할 시기는 다가오고 급한 김에 동생은 술집에 취직을 했다. 오빠의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빚을 지고 또 빚을 지다가 결국은 창녀촌에까지 가게 되었다.

 

   창녀촌에서 돈을 벌면서부터는 동생은 오빠를 일부러 피하여 남매는 소원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생은 꼬박꼬박 오빠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보내왔다. 그것만으로 오빠는 동생이 어딘가 살아있구나, 하며 안심했다. 자기를 피하는 동생을 생각하면 오빠는 마음이 아팠으나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 동생이 마음을 열고 연락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오빠는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 더 이상 학비를 보낼 필요가 없게 된 그 즈음에 동생과 연락이 끊어졌다. 오빠는 취직 후 바쁘다는 핑계로 당분간 동생을 잊고 살았다.

 

  그녀가 있던 창녀촌에 어느 날 불이 났다고 했다.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고 포주도 죽었다. 그녀는 홀로 창녀촌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기의 과거를 알아볼 수 없는 먼 곳으로 갔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했던가, 그녀의 과거는 그녀를 따라 갔던 것이다. 사람의 입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녀는 늘 교회에 다니고 싶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알았던 예수님, 그 분을 섬기며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교회에 등록하고 3년 동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의 감격에 빠져 행복하게 살았던 것이다.

 

  오빠는 목사님 앞에서 술을 취하도록 마시면서, 오열하면서, “내가 살아서는 너를 지켜주지 못했지만 죽어서 가는 외로운 길에 동행이야 못하겠느냐”라는 말을 반복했다. 목사님은 그녀의 삶이 너무 기구하고 자기의 목회가 부끄러워 깊이 상심하여 있던 터라 그때에는 그 말을 주의 깊게 듣지 못하고 함께 오열했다. 며칠 후 오빠도 자살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목사님은 아차, 그때 그가 오열하면서 뇌이던 그 말을 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가, 후회했다. 자기의 불찰로 두 생명이 떠났음을 인정했다.

 

   목사님은 그녀가 예배 후 모과차를 가지고 목양관에 오던 중 여전도회 임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사님은 자신의 목회가 부끄러웠다. 자신이 자기 교회 교인들을 잘못 가르쳤구나, 라는 자책감이 들었다. 더 이상 강단에 설 자신이 없었다. 목사님은 다음 주일 교회를 사임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목회란 무엇인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성도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죄인들의 친구였으며,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다. 예수님은 천한 자들을 배척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신 장면을 기억하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목사든, 사모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리라.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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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      자

 양애옥 사모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산성교회 

 (창골산 칼럼니스트)

 ao-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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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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