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2000 명 vs 12만 명 17일간 혈투

[중앙일보] 입력 2012.05.26 00:25 / 수정 2012.05.26 00:58

미국서 더 유명한 장진호 전투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돼 격전을 치른 미군 해병대 장병들이 눈길에서 쉬고 있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함청]
 
장진호 전투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미 군사(軍史)에선 ‘전설’로 다룬다.

 1950년 10월 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진하던 국군과 연합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 맥아더 장군은 당시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 병력을 최대 7만 명으로 평가했지만 실제 병력은 30만 이상이었다. 11월 26일 북진 중인 미8군과 접촉을 유지하려 장진호 계곡을 따라 강계 방면으로 가던 미 해병 1사단 1만2000 명은 12만 명 규모의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다.

이후 17일간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미군과 중공군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가 바로 ‘장진호 전투’다.

 남북으로 뻗은 해발 2000m급의 산과 깊은 협곡,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 속에서 미 해병은 싸우고 또 싸웠다. 결국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40㎞ 협곡을 돌파해 흥남에 도착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함흥 남하를 2주간 지연시키며 국군·유엔군, 그리고 피란민 20만 명의 흥남 철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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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미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 561 명 , 부상 2872 명, 실종 182 명, 동상으로 인한 사망 3659 명 등 총 7000여 명에 가까운 인명 손실을 봤다. “장진호에서 몇 삽만 파면 군인 유골이 나온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당시 뉴스위크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보도했다. 2012년 말 개봉을 앞둔 3D 최초의 전쟁영화 ‘17 Days of Winter’(감독 에릭 브레빅)도 장진호 전투를 배경으로 삼았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군들은 귀환 후 친목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단체 이름은 ‘극소수가 살아남았다’는 의미로 ‘Chosin Few(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발음)’라고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