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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성서화에 매료되는 이유는 성서학자들이 치밀히 쌓아올려야 얻을 수 있는 연구 결과를 예술적 통찰력으로 단 한 폭의 화면 안에 감동적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그리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성>은 바로 렘브란트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통찰력 있는 예술적 성서 읽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품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 앞에 오게 된 여인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요7:53-8:11)

이야기의 대략은 이러하다. 예수가 성전에서 많은 백성을 가르치고 있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놓고 예수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그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라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는 아무 말 없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썼다.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대 사본 일부에는 ‘그들 각자의 죄목’을 썼다는 기록이 있고, 아라비아 문헌들은 정신이 혼란할 때 낙서를 하는 셈족의 관습이라고도 하고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우리처럼 예수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대자들은 예수를 다그쳤고 마침내 예수가 입을 열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쳐라.” 모세의 율법, 로마의 숨은 위협, 간악한 계략, 흥분한 군중 등 한바탕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예수와 여자만이 남게 되었다.

예수의 마지막 선언, “나도 역시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렘브란트는 이 주제를 그린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매우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간음한 여인이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둘째, 이 그림은 위와 아래의 이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층 가운데 여인과 그 여인의 오른편에서 손으로 그 여인을 가리키고 있는 키 작은 사내, 그리고 예수는 대각선 구도에 놓여 있다. 이제 빛을 받은 예수와 예수의 오른편에 서 있는 남자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대각선을 그어보라. 선을 연장해 그림의 위쪽 오른편으로 쭉 올라가면 그 선이 위층에 앉아있는 제사장에게 닿는 것을 알게 된다. 위층에는 제사장이 있고, 그 앞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두 기둥과 제단이 있으며, 제단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 뒤로는 일단의 남자들이 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의 조합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대신해 용서를 선포하는 제사장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린다.

 

이러한 구도와 배치는 감상자들에게 위층과 아래층을 서로 비교하며 보라는 주문이다.

우선 예수는 제사장에 대응한다. 예수와 제사장 모두 왼손을 각자의 가슴에 올려놓고 있다. 예수의 왼편과 제사장 왼편의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은 고발자들이다. 여인이 무릎 꿇은 제단과 위층의 제단이 서로 대응한다. 이제 이러한 구도를 설정한 렘브란트의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여인은 제단을 암시하는 계단에 놓인 희생제물이다. 희생제물은 드리는 자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께 용서를 간구한다. 따라서 드린 자 는 제물을 드리면서 겸손하고 참회해야 한다. 그래서 위층의 이들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래층의 형편은 어떤가? 거기에는 같이 무릎을 꿇어야 할 이들이 도리어 고발자로 행세한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무릎을 꿇는 대신 자신의 죄가 지적된 현장에서 슬슬 빠져나가는 편을 선택했다.

 

여인은 남성들이 사악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활용하는 것을 방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세상 사람들의 질타와 비난,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놓인 한 여인을 빛 속에 둔다. 그 빛은 용납과 정화의 빛이다. 여인은 예수의 뒤에서 내려오는 빛, 곧 예수를 통해 비치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들어와 있다.

렘브란트가 이해한 복음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마저도 용납과 정화의 빛 속에서 붙잡아줄 사랑의 복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