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분류는 국가명은 이스라엘(Jerusalem, Site proposed by Jordan)이며, 문화로  지정년도는 1981년이다.

현재의 예루살렘 성벽은 ‘오스만 터어키’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인 1542년 슐레이만 황제 1세가 쌓은 것이다.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은 ‘준비된 평화’라는 의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예루살렘의 역사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이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래 예루살렘의 역사는 그야말로 전쟁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서로 자기네 성지라 주장하는 예루살렘 옛 시가지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도

국명(國名)을 표기하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실제 관장하는 국가는 이스라엘이지만 문화유산 신청을 한 곳은

요르단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야파’이다.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동(東)예루살렘에는 사적(史蹟)·성적(聖蹟)이 많으며,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聖墓)교회(그리스도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순례자와 관광객을 위한 호텔· 레스토랑· 상점 등이 많다.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며, 정부 청사와 헤브라이대학· 국립박물관·미술관 등이 있다.

또 금속· 담배· 플라스틱· 신발· 전기기구 공장 등이 있다.

3대 종교의 성지를 비롯해 220여 개의 역사적인 기념물이 있는 예루살렘 옛 시가지가 파괴 위험에 직면한 ‘위기유산’으로

분류된 데는  이를 둘러싼 대립과 반목의 탓도 있다 할 것이다.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성전의 자리는 포로로 잡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 스룹바벨 시대에 성전이 다시 세워졌고

헤롯대왕 때에는 산을 평평하게 깎아 새롭게 성전을 세웠는데 이 성전을 ‘제3성전’이라 부르고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던 당시 존재했던 성전이 이시기의 것이다. 그러나 이 성전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고 AD 70년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졌다.’ 16세기 ‘슐레이만’에 의해 성벽만 다시 세웠는데 그것이 현재 남아 있는 예루살렘 성벽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동쪽, 웅장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원래의 예루살렘 지역.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로 220여 개의 역사적 기념물이

 산재해 있으며 통곡의 벽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종교적 집단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각기 자기네 성지라고 주장하는 예루살렘의 옛 시가지는 총면적이 1km²에 불과한 지역으로,

한 변의 길이가 1km쯤 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좁은 지역을 두부 자르듯 네 구역으로 나눠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무슬림, 기독교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 좁은 지역에서 우리는 다윗과 솔로몬, 예수 그리스도, 마호메트를 동시에 만난다.

옛 시가지를 둘러싼 예루살렘 성벽은 전체길이가 약 4km로 살짝 어긋난 정사각형 형태이다. 기원전 10세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던 당시에도 이곳에는 견고한 성벽이 있었고, 이후 수많은 증축과 파괴, 재건 과정을 되풀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의 성벽은 16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Suleyman the Magnificent)’가 쌓은 것으로 약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평균 높이는 17미터, 망루 34개, 시온문, 사자 문, 헤롯문 등 총 8개의 출입문이 있다.

1. 시온산

예루살렘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의 남쪽 시온문을 나서면 바로 펼쳐져 있다. 해발고도 765m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정신적인

고향이자 종교의 중심지이다. 정상에는 다윗왕의 묘를 비롯하여 최후의 만찬 방, 홀로코스트의 지하실 등이 있다.

다윗왕의 묘는 '마가의 다락방' 부근에 있다. 묘는 가묘이며 석실 안에 길이 2m, 폭 1m 정도의 석관을 안치해 놓았다.

오순절 때에는 참배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시온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마리아영면교회가 있다. 마가의 다락방은 '최후의 만찬 방'이라고도 한다. 다윗왕의 묘가 있는 건물 2층에 있으며, 예수가 12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벌인 방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십자군시대에 세운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지하실'은 다윗왕의 묘 동쪽 건물 지하에 있다. 나치의 만행으로 숨진 유대인을 기리는 유품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사람의 지방으로 만든 비누도 있다. 방 전체가 그대로 나치에 대한 고발이며, 유대인의 처참한 시련의 역사이기도 하다. 시온산 주차장 반대쪽 언덕 중턱에는 ‘성베드로 통곡교회’가 있다. 예수를 재판할 당시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자 닭이 3번 울었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근거로 세운 교회이다.

3. 통곡의 벽

현재의 구 시가지 (Old City)성벽 안 유대인 거주 서쪽 지역에 유명한 ‘통곡의 벽(Wailing Wall)’이 있다.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렸을 때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서쪽 벽으로, 유대인들이 벽에 머리를 대고 통곡하며 기도를 올린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자파문으로 들어가 언덕을 올라가면 광장에 거대한 벽만 남아 있는 곳이 나타나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이 벽은 제2신전시대(BC 516~AD 70)에 헤롯왕의 신전을 에워싸고 있던 외벽의 일부로,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신전을 허문 뒤 남은 것이다. 지금은 온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의 운명을 슬퍼하여 이곳에 와 통곡하는 벽이 되었다.

유대인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성지이며, 남녀별로 구분된 기도 장소가 있다. 들어갈 때 남자는 ‘키파’라는 모자가 없으면 배치 된 종이 모자를 빌려 써야 한다. 반바지 차림이나 소매 없는 옷차림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축제일에는 사진도 찍을 수 없다.

당연히 이곳은 유대교 최고의 성지이다.

4. 황금사원(바위의 돔)

이 자리는 아브라함이 그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으로 믿고 있으며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웠던 자리다. 아름다운 황금빛 돔 때문에 옛 시가지 전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바위사원은 이슬람교의 3대 성지 중에 하나다.

7세기에 건립된 사원 안에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 대신 양을 바칠 때 썼던 바위이자 예언자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밟았다는

주장을 하며, 황금사원을  만들었다. 이슬람 대사원으로, 구시가지(Old City)에서 가장 높은 성전산(Temple Mount)에 위치한다.

 '오마르 모스크(Mosque of Omar)'라 부르기도 하며, 지붕이 황금으로 되어 있어 '황금 사원' 이라고도 한다. 건물은 8면체로 되어 있는데, 윗부분은 면마다 다른 타일을 붙였고, 아라비아 문자로 코란이 새겨져 있다. 돔 내부 한가운데 목책으로 둘러싼 바위가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눕혔던 장소로서, 고대 신전의 제단이다.

북쪽 문 정면의 바닥에 천국의 타일이라는 녹색의 바위가 있다. 마호메트가 이 바위에 19개의 금 못을 박았는데,

이것이 다 없어지면 지구는 다시 원초의 혼돈상태인 카오스로 돌아간다고 한다. 현재 못 3개가 남아 있다.

내부의 홀을 받치는 대리석 기둥은 높이나 두께, 색깔 등이 가지각색이어서 건물의 복잡한 역사를 말해준다.

바위 밑 동굴은 예배소이다. 안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하고 복장은 단정해야 한다.

5.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에께 호모 수도원>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의 옛 도시의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성묘 교회>까지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십자가의 14 지점(처소)"가 있으며 각각의 처소는 신성한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데,

라틴어로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라고 불리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갈보리 언덕)을 향해 걸었던 약 800m의 길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길을 말한다.

물론 역사속에서 비아돌로로사는 수정되기도 했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14처소를 믿음으로 순례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의 의미를 더욱 마음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는 제 1 처소인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 받았으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심문을 받은 후 빌라도 총독에게 보내져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는 각각의 의미를

지닌 14개의 지점이 있으며, 이는 18세기에 확정된 것이다. 이 중 일부는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현재 매주 금요일 순례자들은 십자가 수난을 기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돈과 위협에 굴복한 증인들이 예수님을 거짓증거하지만

 죄를 찾기가 어려웠다. 자기를 심문하는 제사장들이나 장로들 앞에서 그리고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침묵하셨다. 지금은 아랍 국민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인 오마리의 학교 건물이 있고, 그 건물에 ‘미네렛 탑’은

 전통적으로 "안토니아 탑"이라 불리며 예수님이 심판받은 장소를 기념한다. 예수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카에사리아)에

있었으며, 당시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반(反) 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곳에 선고교회 (Church of Condemnation)가 서 있다.

제 2 처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를 지신 곳에 세워진 작은 교회에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곳에

세워진 교회의 천장에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면류관의 문양이 장식되어져 있었다. 로마 군사들이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으로 이곳으로부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했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를 메고 나오는 예수를 보고 “자, 이 사람이오(요한복음 19:5)”라고 했다.

제 3 처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 처음으로 넘어지셨고, 제 3처소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쓰러지신 장소를 기념한 곳이다.

 밤이 맞도록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끌려 다니며 심문을 받으시고 다시 총독 앞에서 사형을 선고받으신 다음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에 채찍을 맞으시면서 골고다로 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쓰러지셨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 사형은 이미 기둥은 세워져 있고 옆으로 달 가로 축을 메고 올라가는 형태였는데 보통 성의 문에 걸어두는 문의 빗장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두께가 약 12Cm, 길이 약 180cm, 무게는 약 40Kg정도 됐었다고 한다. 나무의 무게보다 더 더 무거운 것은 그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죄의 짐을 진 십자가이었기에 그 무게는 무엇으로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었다.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에

 속해있는 작은 교회당에 표시되어 있다.

제 4 처소에서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났으며, 아들인 예수를 보기위해 길가에 서 계시던 마리아가 서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카톨릭 예배당>은 그런 마리아의 슬픔을 기념한다고 한다.

제 5 처소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Simon of Cyrene)이 강제로 십자가를 대신지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은 15:21절에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 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어었다(마가복음 15:21)”라고 되어있다.

1895년에 세워진 프란시스칸 교회가 있다.

제 6 처소에서 <베로니카 여인(St. Veronica) >이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준 것을 기념하는 장소이며, 성 베로니카가 예수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는데 돌려 받은 손수건에 예수의 초상이 새겨졌다는 전승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가 1882년에 이 지점에

 기념교회를 세웠습니다. 작은 예배당 내부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주던 당시의 삽화를 발견할 수 있다.

제 7 처소에서 기둥에 표시 되어 있으며,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넘어지셨고, 당시에는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3:12~13). 1875년에 이곳에 두 개의 예배당이 세워졌다.

제 8처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는 여인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누가복음 23:28) 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셨고, 기념 예배당이 있던 다른 처소와는 달리 희랍 정교회의 벽에 라틴 십자가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제 9 처소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넘어지셨는데 로마시대의 기둥이 제 9 처소를 기념하며,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콥틱 교회가 서있습니다. 건너편엔 성묘 교회가 보입니다. 십자가형 집행 장소를 바라보시며 넘어지셨을 것 같다.

제 10처소는 예수님의 옷을 벗기셨는데(요한복음 19:23~24) 제 10 처부터 제 14 처까지는 성묘교회 안에 위치한다.

 교회 안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이곳이 골고다 언덕이라는 표식을 발견할 수 있다.

제 11 처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누가복음 23:33), 기념하는 성화가 그려져 있으며,

제 12 처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곳(마태복음 27:45~51)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모양을 만든 주물이 있고,

이곳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고 외쳤으며, 제단 아래에 바위의 갈라진 틈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발생한

지진으로 생긴 것이라고 전해진다.

제 13 처소는 예수의 시체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내려놓은 지점으로(마태복음 27:59) 바위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염한 장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14 처소는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 지낸 곳으로(마태복음 27:60~61) 성묘 교회 정중앙의 천장 돔은 어두운 실내로 밝게 비치는 햇살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제10지점 에서 제14지점까지는 처형의 목적지인 골고다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안에 있다.

6. 성묘교회

  성묘 교회는 오늘날의 구 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서기 336년에 처음 교회가

만들어 졌으나, 페르시아인에 의해 614년에 파괴되었다. 그 후 테도시우스 수도원장인 모데스터스(Modestus)에 의해 다시

건립 되었으나, 1009년 이슬람 아바스조의 알 하킴 빈 아므르 알라(al-Hakim Bi-Amr Allah) 칼리파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교회는 십자군에 의해서 다시 세워진 것이며 그 후 여러 번에 걸친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오늘날까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교회 내부는 카톨릭교, 그리스 정교회, 콥틱 기독교,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각각 구획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으며, 교회의 열쇠는 이슬람 측이 소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이 있는 이곳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무척 중요한 곳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자리에 세워졌다는 ‘성묘교회’는 기독교 최고의 성지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다는 길에 세워졌는데 비아돌로로사 10처소에서 14처소가 있는 곳이다.

그 외에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던 장소 등도 신성시되기는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세워진 교회로 오늘날의 구예루살렘 북서쪽의 골고다 언덕 위에

위치한다. 성분묘 교회, 무덤교회라고도 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십자가가

 세워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19:41).

7. 신 예루살렘(New City) -8개의 문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총 8개로 성안에 살고 있는 4개의 구역 사람들이 주로 통행하는 문이 다름으로 그 역사와 이름들이

주어지기도 했다. 예루살렘 성의 문들은 방향과 관계가 있다. 성 안의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관련해서 이름이 붙여진다.

서쪽의 자파문(Jaffa Gate), 북쪽의 다마스쿠스문(Damascus Gate), 헤롯문( Herod's Gate), 새문(New Gate), 동쪽의 사자문

(Lion's Gate, 스데반문)과 황금문(Golden Gate, 미문), 남쪽의 분문(糞門, Dung Gate)와 시온문(Zion Gate) 등이다.

(1) 동쪽의 사자문(Lion's Gate, 스데반문- Stephens Gate)

'사자의 문'은 감람산을 마주보는 성벽의 동쪽에 있다. 사자문은 사자 4마리가 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며,

뒷이야기에 의하면 '쉴레이만 술탄'의 꿈에 '네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서 술탄을 삼키려고 했다'고 전해진다.

문을 보수하지 않으면 사자들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해몽에 의해서 성문을 보수하고 문아치 위에 네 마리의 사자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불리어지는 이름이다.  

이 성문은 갈람산을 마주보며 예루살렘의 동쪽 성문으로 또한 이 문을 '스데반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스데반'이 이 근처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셨기 때문이다. 이 문을 따라 내려오면 키드론 골짜기에 성 스테파노 성당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죄를 통회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문이 여호사밧 골짜기로 내려가는 곳이기 때문에 '여호사밧 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전 제사가 있을 때에는 이 근처에서 양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었기 때문에 '양의 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 청결작업을 하셨던 곳이며, 이 성문을 나와 기드론 골짜기로 조금 내려가면

스데반 기념교회가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여호사밧 계곡으로 향한다하여 ‘여호사밧 문’이라고도 하고,

마리아의 무덤이 이 근처 어디 있다고 하여 ‘마리아 성문’이라고 하기도한다.

특별히 제물로 사용될 모든 양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여 ‘양문’이라고 불러지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도 바로 이 문 안으로 10m 정도 들어오면 바로 곁에 위치하여 오늘날도 많은 성지연구를 위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현재 이 사자의 문은 주로 아랍 사람들이 이용하는 문으로 1920년 영국군이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입구를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다.

(2) 헤롯문( Herod's Gate)

  '헤롯 문'은 이문은 북쪽 성벽 동쪽이 있다.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서 북쪽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헤롯 시대에

'헤롯 안티파스의 궁전'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헤롯의 궁전이 이 근처에 있었다고 해서 이 문을 헤롯문이라고 불리어졌다. 즉, 헤롯문은 빌라도와 함께 그리스도교를 탄압한 헤롯의 저택 근처에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유대인들은 꽃들로

장식된 문이라 해서 '사아르 헤파라힘(꽃의 문)'이라 불렀고 아랍인들은 '초소의 문'이라 불렀다.

현재 아랍인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문으로 1875년부터 약 25년 동안 막혀 있다가 1879년 시민들의 요구로 다시  제게된 문이다.

이 문은 아랍 재래시장으로 연결되어 주로 아랍 사람들의 통행에 사용되는 문이다.

(3) 북쪽의 다메섹문(다마스쿠스문- Damascus Gate, 미문)

다메섹문은 동쪽으로 헤롯문과 서쪽으로 새문 사이에 있는 문이다. 예루살렘 성벽이 있는 문들 가운데 가장 크고 인상적인 문이다.

즉,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현재 8개의 문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문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향해 세웠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다메섹문’ 혹은 ‘다마스쿠스문’은 아랍인들로 항상 붐빈다.

이 문은 다마스쿠스 방향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 문'이라 부른다.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다메섹:시리아의 수도)를 향하고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다메섹 문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여기서 출발하여 세겜을 거쳐 멀리 복쪽 다메섹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이 문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語)로는 '세겜(Shechem)으로 통하는 성문'이라는 뜻으로 '사아르세겜‘이라고 하고, 아랍어로는

'바브 엘 아무드(원주형 기둥의 성문)'라고 부른다.

바울이 변화되기 전 사울은 이 문을 통과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통과했을 겁이다(사도행전 9:1-2).

이 문은 '쇠로 덮여 있는 3중의 문'이었다고 한다. 북쪽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은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벽과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적을 방어하기 좋다. 북쪽만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항상 적들은 북쪽으로 침략해 들어왔고 성은 북쪽을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로마시대에 예루살렘의 중심 성문이었고, 최근 이 성문에서 시온 게이트까지 이어졌던 웅장한 중심도로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자파 게이트·시온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성문에 속하며 적의 갑작스러운 침범 시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ㄴ자형으로 만들었다. 원래는 삼중 문이었으나 지금은 한 쌍의 문만 남아 있고,

돌출 총안(銃眼: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불·돌·열탕 등을 퍼붓는 구멍)을 갖춘 2개 탑이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랍 바자(Arab bazaar)와 시장이 시작되고, 왼쪽으로 이슬람교인 지구,

오른쪽으로 그리스도교인 지구가 위치한다.

둘레 4㎞, 평균 높이 17m의 성벽은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왕이 건설하고 헤로데스(Herodes:헤롯대왕, BC 73?~BC 4)이 재건했다고 전해지며, 슐레이만 대제(1520~1566 재위)가 1536~1542년에 복원하였다.

오늘날에 이 문은 아랍 사람들이 가장 많이 통행하는 문이다. 이 문으로 나가면 아랍 야시장과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기 때문이다.

(4) 새문(New Gate)

새문은 북쪽 성벽 서쪽이 있는 문이다. 이 문은 성 밖 기독교 지역과 성 안 기독교지역을 연결하는 문으로써 1889년에 세워진 문이다. 특별히 '새 문'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유다인, 이슬람교도,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그리스도교도 구역이다.

그 중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통행을 쉽게 하기 위해 약 100여 년 전에 새로 만들어진 문이라 해서 ‘새 문’이라 부른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성지에 성당들을 건축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성지에 대한 각 교구의 알력도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 헬레나 성녀에 의해 지어진 ‘예수님 무덤 교회’가 있다.

이 문은 1948년 요르단인들에 의해 막혔다가 이스라엘에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로 통행을 재개하였다.

(5) 서쪽의 욥바문(자파문- Jaffa Gate, 다윗의 문, 헤브론 문)

가장 번화한 욥바(자파)문은 옛날에 화물이 통과하던 항구였다. 욥바문은 성 서쪽에 있는 유일한 문으로 ‘다윗의 문’은 동로마와

십자군 시대에는 옆에 망대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 문'이라고도 불리었다. 옆에 다윗의 망대가 있기에 ‘다윗문’이라고도 한다.

 아랍어로는 ‘바브 엘  카릴’(헤브론 문)이라고 하는데 ‘엘 카릴’은 ‘하나님의 친구’란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문’이라고도 한다.

‘욥바문’으로도 불러지는 이 성문은 십자군 문이 있던 자리에 슐레이만대제에 의해 세워진 문으로 이 문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문으로부터 지중해 연안 욥바항구로 이어지는 길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이름도 지중해 변에 있는 항구도시 용바(자파)로

향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에 각종 물품을 공급했던 곳이 욥바(야포) 항구였기 때문에 이 문의 용도는 상당히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랍 사람들은 '헤브론 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 정면에는 ‘슐레이만 대제가 1538년 이문을 세웠다’라고 아랍어로 쓰여 있고 그 밑에 최근의 문구로서 1970년에 보수를 마치고 나서 “예루살렘이 보수됨”(느 4:7)이라고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쓰여 있다.

1898년까지는 오른쪽의 야포 문과 왼쪽의 다윗 망대 사이에는 성벽이 있었으나   1898년까지는 욥바문과 다윗망대 사이에는

성벽이 있었으나 독일 황제 카이자르 빌헤름 2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차가 들어오기 위해  마차가 들어오기 위해 흘어 내어

길을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

1917년 영국 알렌비 장군이 영국군의 선두에 서서 이 욥바문을 통해 걸어서 들어왔다. 이 욥바문은 1948년에 봉쇄되고 이 옆에

방어벽이 세워졌었다. 1967년 6일 전쟁 때 회복되어 다시 사용되고 있다.

(6) 시온문(Zion Gate)

시온문은 성의 남쪽 성벽 서쪽에 있다. 시온산으로 통하기 때문에 ‘시온문’이라 부르고 시온산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을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아랍어로 ‘예언자 다윗의 문’이라고도 한다. 시온문은 1889년 노트르담교회와 그리스도교지구를 연결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시온 문'은 성의 남쪽 성벽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이 시온 산으로 통하기 때문에 시온 문이라고 불렀고

이 문을 통해 시온 산에 이르게 되면 다윗 왕의 무덤을 만나기 때문에 ‘예언자의 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문 바깥쪽에서 보면 수많은 총탄 자국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948년 독립전쟁의 흔적이라고 한다.

그 후 1967년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완전히 관할하면서 보수되어 사용하고 있다. 이 문은 주로 유다인 구역에 살고 있는

 정통 유대인들이 시온 문을 통과해서 다윗 왕의 무덤으로 통행할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을 통과해서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이 있었던 위층 방을 오르게 된다.

(7) 남쪽의 분문(糞門, Dung Gate) - 똥문(오물 문)

'분문'은 예루살렘 성벽의 남동쪽에 있으며 문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을 통하여 각종 오물을 버리게 됨으로

 '쓰레기 문', '오물 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분문은 이곳을 통해 쓰레기를 운반한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이 문을 통해 버린

오물을 ‘기드론 골짜기’를 통해 ‘사해바다’까지 흘러간다.

골짜기로 바로 연결되는 문이기 때문에 이 문을 통하여 내려가면 ‘실로암’ 연못을 만날 수 있다.

실로암은 기드론계곡 남쪽 500m 지점에 있는 모스크의 녹색 철문을 들어서서 계단을 내려가면 기혼샘에서 흘러나온 실로암의

연못이 있다. 《구약성서》에도 '아래의 연못'으로 나오지만, 예수님이 이 물로 장님을 눈뜨게 하였다는 《신약성서》의 기록으로

유명하다. 기원원 1세기 중반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1880년에 기혼샘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터널에 관한 내용의 '실로암 비문'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이스탄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물에 소경이 눈을 씻으러 가던 눈먼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었던 곳'이다.

이 문은 현재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이다. 이 문을 통하여 성전 산으로 올라갈 수 있고 지금의 통곡의 벽으로

기도하러 올라 갈 수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8) 황금문(Golden Gate, 미문),

'황금 문'은 성벽과 성전의 정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문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굳게 닫혀져 있는 문으로 하나는

 ‘자비의 문’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이라 한다.

'황금 문'이란 이름은 이 문이 호화롭게 꾸며져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이 문에 대한 전설이 많이 있다.

유대인들은 에스겔서 44장 1-3절에 언급하고 있는 '메시아께서 오실 때 열리게 될 문이 바로 이 문'이라고 말한다.

황금 문 바로 밑이 ‘기드론 골짜기’인데 이 골짜기를 요엘서에서는 '여호사밧 골짜기'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곳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곳이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마지막 날에는 이 황금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부터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고 있기에 누구나가 황금문 근처에

묻히기를 원한다. 현재 황금문 근처는 물론 건너편 감람산 기슭까지 묘지로 가득차 있다.  마지막 심판 때 메시아께서

오실 문이기 때문에 이 황금 문 가까이에 뭍이기를 열망했던 아랍인과 유대인들의 많은 석조로 만든 무덤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족 수 만큼의 돌들을 오려놓았는데 가족들이 메시야께서 오실 때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황금 문 근처에는 아랍인들의 무덤, 기드론 골짜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무덤 건너편에 있는 올리브 고개에는

유대인들의 무덤으로 산이 덮여 있다.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이 황금문은 지금은 무덤과 잡초로 가장 지저분한 문으로 변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종려가지를 들고 입성하신 문이 이 ‘황금문’이었고(막11:8, 요 12:13) 마지막 날에 다시 이 문을 통해

 예수님과 신자들이 입성할 것이라 한다.

주후 631년 비잔틴 ‘헤러크리우스’ 왕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페르시아로부터 이 문을 통해 가지고 들어왔다 한다.

이 문은 7세기경에 만들어졌고 터어키군에 의해 봉쇄되었다. 문이 닫힌 것에는 많은 유래가 있는데, 유대인 메시야가

이 문을 통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고, 또는 외국인이 이 문을 통과하여 성전 뜰을 밟으면 회교도들이

예루살렘에서의 지배권을 잃게 된다는 아랍의 미신에 의해 <1540년 슐레이만 대제가 돌로 완전히 폐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