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3 새벽2부 예배, 김동진 목사님 '온유함이 주는 은혜' 말씀 요약, 사무엘상 24:1~7, 작성자: 이용석 안수집사>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자신의 이익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유익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와 마음을 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올바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때그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사울은 이와 반대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영적인 시야를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한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모든 힘과 관심을 다윗을 추격하는 일에 쏟아부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사울은 다윗을 쫓던 일을 멈추고 전쟁터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나섰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백성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집중해야 했지만, 사울의 시야는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을 통해 사울의 시선을 돌리려 하셨지만, 사울은 나라를 침략한 블레셋보다 다윗을 붙잡는 일을 더 큰 전쟁으로 여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 있는데, 때로는 우리의 감정을 건드린 사소한 일에 매몰(埋沒)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말이나 작은 오해와 서운함 때문에 정작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중요한 사명과 책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은 적당히 처리한 채 모든 관심을 다윗에게 쏟았습니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하는 동안 다윗을 엔게디 요새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의 추격이 큰 위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 다윗을 안전한 요새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피할 길을 마련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지도 제작사인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에서는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주요 정상들이 취임할 때마다, 특별히 제작한 최신 세계 지도를 선물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지역이나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넓은 시야로 나라를 이끌어 달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계 지도보다도 더 귀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 전체를 바라보기보다 눈앞의 문제와 감정에만 매몰되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작은 서운함과 분노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더 넓은 세상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온유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온유함은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열어 주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보게 합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오자 주변 사람들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the Desert of En Gedi)’에 있다고 말하며 사울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23장 29절에서는 그곳을 ‘엔게디 요새(the strongholds of En Gedi)’라고 표현합니다. 같은 장소를 두고도 한쪽에서는 '요새'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광야'라고 말합니다.
사울 주변의 사람들은 다윗이 안전한 요새에 있다고 말하기보다, 공격하기 쉬운 황무지에 숨어 있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감정에 휘말린 사람들은 단어를 조금씩 바꾸어 상황을 왜곡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분노를 가라앉히기보다는 그 분노를 더욱 부추긴 것입니다.
'엔게디(En Gedi)'라는 이름에는 ‘샘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엔(En)’은 샘을 의미하고, ‘게디(Gedi)’는 들염소나 산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엔게디는 단순한 황무지가 아니라, 들염소와 산양이 살아가고,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는 풍성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메마른 사막에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물과 먹을 것이 있어 함께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만날 때, 자신의 처지를 광야나 사막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 한가운데에도 샘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서 주신 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찾아간 장소가 ‘들염소 바위’라고만 묘사되면서 ‘샘’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것처럼, 감정에 휘말리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공급과 은혜를 놓치게 됩니다.
성경에는 감정 조절에 실패하여 큰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자 몹시 분노했고 얼굴빛까지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지만, 가인은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우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화를 내거나 누군가와 심하게 다투면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음성조차 온전히 들을 수 없습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우리의 성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분노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온유함이 아닙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내려놓고 다스리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모세 역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를 가지고 회중 앞에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반복되는 원망과 불평에 모세의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지만, 반석에게 말로 명령하는 대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자신의 기억과 방식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에 휘말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정확하게 순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듣고, 내가 알고 있는 방식과 과거의 경험대로 적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분노가 일어날수록 우리는 더욱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온전히 들어야 합니다.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 물은 나왔지만, 성경은 그 장소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툰 곳으로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주신 구원의 사건이 모세의 감정으로 인해 ‘다툼’의 사건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감정에 휘말린 사람의 행동 때문에, 그 은혜가 다툼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일을 맡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우리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은혜로운 일이 다툼과 상처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수록 더욱 온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정확히 듣고, 우리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 감정을 온전히 조절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한 감정과 실패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를 들추어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떻게 나를 모른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상한 마음을 나무라시기보다 그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와 죄책감, 분노와 실패를 치유하시며, 우리의 감정을 온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안경을 쓸 때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모두 똑같이 선명하게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목적에 따라 안경을 바꾸거나 초점을 조절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인 안경을 쓰면 눈앞의 이익과 감정만 보이지만, 영적인 안경을 쓰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안경을 벗고, 영적인 안경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문제와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분노가 일어날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경험과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주시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광야에 샘을 준비하시고, 위기 가운데 요새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정에 사로잡히면 그 샘과 요새를 보지 못합니다.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인 시야를 회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상한 감정이 회복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좁아진 시야가 열리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넓고 풍성한 은혜의 세계를 바라보길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적인 안경과 렌즈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인생을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우리가 온유함을 품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영적인 시야를 가지고, 그 안에서 참된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