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0 토새깨 담임 목사님 '요시야의 죽음을 기억하라' 말씀 요약, 역대야 35:20~25, 작성자: 이용석 집사>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듣고나서 정말 그 앞에 울부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것을 다 완전히 멸절합니다. 전통적으로 가나안에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왔던 산당을 통한 신앙들을 요시야 때에 가장 처음으로 제대로 없앴습니다. 나중에, 산당을 없앤 왕은 요시야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완전히 없어지고 잃어버렸던 유월절을 회복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이 수많은 일들을 감당한 사람이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왕과 하나님의 종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잘 믿어도 절대로 믿음에 있어서는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믿음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항상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세를 봅니다.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겸손해지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로 순종할 수 있고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의 종들이 될 때,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 은혜를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말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그런 말씀입니다. 요시야가 일을 마친 후에 어떤 일이 생기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경청하지 않고 변장하다가 급작스럽게 죽게 된 것입니다. 요시야가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는 그런 얘기도 아닙니다. 이것이 요시야가 우리에게 마지막에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쨌든 더 많은 풍성한 이야기들을 항상 전해줍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역사에 처음에 다윗이 있었다면, 마지막에는 요시야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두 위대한 왕들이 다 하나님 앞에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요시야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비춰주는 영적인 자세에 대해서 나누길 원합니다.
첫 번째, 성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우리는 주목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마친다는 것이 완성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마친 다음에 이것을 완성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는 굉장히 흔들리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는 완성은 없고 완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마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결승전까지 뛰어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도 무엇인가를 마치고 시험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치고 나서 더욱더 성전 중심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삐긋거리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정돈을 마치고 나서 위기가 찾아옵니다. 애굽의 느고가 바벨론을 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지나갑니다. 이것이 위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 요시야 스스로가 이것을 위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느고의 침입과 요시야가 갖고 있는 판단 미스, 느고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 변장과 죽음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자세가 흔들리는 순간이 시작점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믿음의 경주를 계속 똑같이 달려가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제 한 걸음 뒤로 가야지 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믿음이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후퇴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후퇴하지 말고 전진해 나가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요시야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실수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외의 사람들,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 심지어는 하나님과 멀어 보였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를 제한하고 우리의 마음대로 판단하며, 우리가 그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적에게서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요시야가 바로 그 부분에 실패한 것입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이것을 사반을 통해서 읽습니다. 그 때, 요시야가 옷을 찍고 통곡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것도 참 귀한 것으로 요시야가 받은 복의 어떤 한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요시야의 문제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다른 사람들의 말 자체를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지도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 맞다고 하고 내가 선호하는 삶의 방식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다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시야가 실패한 지점은 내가 듣기 싫어하는 사람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힐기야와 사반이 주는 말씀처럼 받아들였다면, 요시야는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적의 입술에도 귀를 기울여 보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심지어는 나귀의 입을 열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다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귀를 겸손하게 열고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 번째, 변장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숨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자마자 우리는 숨었습니다. 우리는 숨는 존재입니다. 다윗은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 숨는 곳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가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만 명이 들어가는 지하 벙커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 숨으려고 하고 변장하려고 합니다. 지나치게 너무 포장합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포장하는 이야기들은 절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과대로 포장된 것에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절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포장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배에 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담백하고 대단한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포장된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변장한 것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요시야가 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하고 숨을 바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변장이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요시야가 잊었고, 너무나 순식간에 요시야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숨는 믿음의 사람들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 안에 평안과 기쁨과 참된 삶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오늘 전쟁이 이루어지는 곳이 므깃도입니다. 므깃도는 킹스 로드 또는 하이웨이라고 하는 왕의 도로와 해안 도로가 만나는 고대 족장들의 도로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걸었던 그 길이 만나는 모든 길의 교차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므깃도는 전쟁의 핵심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 아마겟돈입니다. 아마겟돈이 므깃도입니다. 므깃도는 싸움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므깃도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식탁이 므깃도이고, 어떤 사람은 차 안이 므깃도입니다.
우리는 므깃도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므깃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므깃도에서 영적 싸움을 반드시 승리하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들도 므깃도에서 승리하길 축복합니다. 자꾸 므깃도에서 지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식탁을 거룩한 곳으로 바꾸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차 안이 싸우는 곳이 아니라, 찬양 듣고 은혜 받는 곳으로 변화되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므깃도를 예루샬라임과 샬롬의 도시로 바꿀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전에서 멀어지거나 완성했다고 방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듣는다면, 우리는 요시야처럼 급작스럽게 마쳐지는 인생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의 평안 속에 살아가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