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3 토새깨 담임 목사님 '말씀에 반응하는 영성' 말씀 요약, 열왕기하 22:8~13, 작성자: 이용석 집사>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우리의 임계점이 어디인지 내가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히스기야와 요시아 때, 하나님께 돌아감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다시 구원의 기회를 얻었는데, 안타깝게도 나중에는 그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결국은, 그들은 심판을 받고 나라가 멸망하고 하나님의 몸된 성전이 불타서 없어지며 포로로 잡혀가는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돌아가는 것이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에 반응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만날만한 때에, 응답하고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돌아오라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 때, 빨리 반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말씀에 대해서 배우고 신앙으로 자란 요시아는 젊은 청년이 되고 왕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고치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인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 다들 그냥 어떤 관성에 의해서 계속 예배드리고 그러던 삶에서 성경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것을 대제사장 힐기야가 찾아가지고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이 요시야 앞에 가서 읽었습니다. 
   요시아의 정말 큰 은혜는 돌이키는 은혜입니다. 요시야는 말씀을 듣자마자 깨닫게 되면서 눈물이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틀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대한민국을 울면서 틀어야 합니다. 요시아처럼 나라의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정말 상한 마음을 갖고 나가서 울면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되고 이 나라의 영적인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항상 당연히 율법을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이렇게 지내온 것 같지만, 우리가 역사서를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압니다. 사사기에 보면, 몇 세대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원래 구전으로 말로 이어져 오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서, 구전도 문서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말도 기억이 안 나고 문서도 사라져서 레퍼런스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의 말과 생각들이 절대적으로 전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록한 성경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대로 말하다가도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그 말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문제는 하나님의 전에 이 말씀을 숨겨두고 자신들의 삶에는 말씀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디 한 군데에 들어가서 숨어 있었고 모두가 말씀 없이 살았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면, 교회에서만 말씀을 듣고 말씀을 보는 행위로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우리가 당연히 교회 나와서 말씀 듣는 것이 너무나 귀한 것이지만, 여기에 모든 것을 두고 밖에서는 말씀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면, 결국 우리도 요시아의 때에 이스라엘과 똑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교회에만 두지 말고, 삶으로 가져 나가길 축복합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오늘 찾은 말씀이 신명기 말씀으로 추측을 합니다. 특별히, 서기관 사반이 읽어준 말씀 가운데, 쉐마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가까이 두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은 부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주변과 나의 책상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두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는 가정이 순식간에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가정들이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정작 우리의 가정과 삶에는 말씀이 없는 그런 기독교 집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독교 가문이 되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우리의 삶에 말씀이 흘러들어가야 합니다. 교회에만 성경을 놓고 왔다 갔다만 하지 말고, 쉐마가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길 축복합니다.
   요시아는 하나님의 쉐마의 말씀을 들을 때, 그가 옷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반응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이 과시적이거나 전시적이 되면, 점점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믿음의 길을 택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보여주고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지키는 믿음도 어느 정도 있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그 믿음의 모습을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믿음 생활을 하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길 축복합니다.
   요시아가 옷을 찢고 하는 이런 반응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반응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요시아가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의 반응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칭찬해 주신 것처럼, 그 마음과 반응을 꼭 기억하길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을 받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올 때 기뻐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갈은 전시적으로 과시적인 것 밖에 없어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 생각하였고 언약궤가 들어올 때, 너무 좋아가지고 남의 눈에 상관없이 막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어린 아이의 반응처럼 기뻐하였습니다.
   다윗과 요시아가 비슷한 면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반응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존재인 언약궤를 향한 어린 아이와 같은 그 반응이 결국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은혜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반응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멘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반응하는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감사로 눈물로 회개로 반응하는 이 자세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결국에 차가운 이스라엘의 왕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하나로 말하자면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패턴이 보이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요시아가 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앞에 나아갔던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교회가 재미있어서 나오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시아는 잠깐 말씀에 흥미를 갖고 덤벼든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 앞으로 산당과 우상을 없애는 일들에는 많은 시험과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려면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지키려면 갖고 있는 흥미를 넘어서야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깐 재미있을 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려울 때도 믿어야 하고, 시험이 닥쳐와도 믿어야 하고, 나와 어려운 사람이 생겨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이 땅을 고르는 일들을 감당하고 씨를 뿌리며 그 열매를 돌볼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곳에 회복의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반응하는 주의 종들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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