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1 새벽2부 예배 담임 목사님 '온전하게 보는 방법' 말씀 요약, 마태복음 22:34~40, 작성자: 이용석 집사>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사랑이라는 차원에서는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대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렌즈를 함께 써야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회를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교회를 어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신앙을 벗어난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이 땅 가운데서 발을 내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땅과 하늘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이 렌즈를 함께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보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시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또한 둘째 계명으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두 개의 렌즈가 온전하게 씌워지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도전을 합니다. 그중에, 오늘 본문 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들로서 '부활이 없고 이 땅의 삶이 전부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주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마 사두개인들은 이 논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이 없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부활절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맞을 때, 부활절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우리의 머리로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절을 통해서 다시 부활의 소망을 반드시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부활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떠나서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과 성경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면, 우리는 부활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리의 논리와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이제 사두개인들이 입을 다물고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자, 이제 다음 타자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이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율법사는 그 많고 많은 질문 속에서, 예수님을 곤란하게 할 만한 질문을 가져왔습니다.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는 이 질문은 율법 중에서 어떤 하나를 크게 함으로써, 다른 율법이 작아지게 하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율법 모두를 지켜야 하고 율법 모두가 중요한데, 예수님이 하는 말씀에 따라서 안식일에 대한 율법이 중요해지고 나머지는 덜 중요해질 수 있는 이러한 가능성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에 세상에 없는 답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딱 두 개의 계명으로 우리에게 집약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이 계명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게 되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로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둘째는, 그와 같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라' 입니다.
첫 번째는, 신명기 6장 5절에 쉐마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자 토라인 모세 오경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조항들을 지키고 나의 행동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율법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무엇을 입고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율법들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율법은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이후 2차 성전을 짓고 성전이 없는 그 기간 동안에 율법으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믿음이 지켜지는 것이었는데, 성전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 대신 들어온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 율법을 갖고 사람들을 다스린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바리새인들이 여전히 힘을 갖고 율법으로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로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이 삶이 되어서 그들을 짓누르는 짐이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계명을 통해서 '율법이 사랑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은 '주님 사랑합니다'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가장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찬양이고,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에 주님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바라보고 주님과 더 함께 있기를 원하며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가장 복되게 하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안경은 각각 다른 도수와 기능으로 있을지라도, 결국은 하나가 됩니다.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 사랑이라는 렌즈를 끼지 않고서는 올바른 신앙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시(注視)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보려면 두 눈을 떠야 됩니다. 그 두 눈에 어쩌면 주시만큼 중요하진 않지만, 우리를 온전하게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그 시선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그 발걸음을 함께하지 않으면, 온전하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렌즈는 작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똑바로 보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똑바로 보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더불어, 이웃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에 십자가 바라보고 사순절의 모든 영적인 행위를 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바라보는 것만큼 주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 나온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세상에 나가서 윗집과 아랫집과 옆집을 사랑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책상 옆에서 일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함께 섬기는 주의 종들을 사랑할 때, 그것이 바로 온전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두 눈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고난 주간 동안에 더욱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우리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